12/27-28 서울코믹월드 신간 2종 수량조사 받습니다!
12/27-28 학여울 SETEC에서 열리는 서울코믹월드
1관 A20 '코끼리봉지+사이퍼의 농구공을 토스'
부스에 위탁하는 쿠로코의 농구 미도리마Xts아카시 신간 수량조사 받습니다!
≪사랑, 해도 될까요?≫
미도리마 신타로 x 아카시 세이카
A5 / 64p / 6,000원
R19
본 책은 성인본으로, 96년생 이전 탄생자분에게만 판매합니다. 실은 요즘 점점 성인 기준이 헷갈려요
미성년자의 신분증 날조 및 성인 지인을 통한 대리구매 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덧붙여 본 책에 19금 지정을 내린 것은 내용보다는 소재 때문입니다. 이 점 숙지해 두시고 구매해 주세요.
*<쿠로코의 농구> 본편과는 관계 없는 AU이며 녹ts적입니다. 세이쥬로가 아니라 세이카가 나옵니다.
*10살 많은 양호 선생님 미도리마한테 꽃다운 여고생 세이카가 여러 가지 의미로 함락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강간, 임신 소재 주의. 이미 여기서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제목과 달리 내용은 밝고 평화롭고 아름답지 않습니다.
*본 책은 수위와 소재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므로 정확히 수량조사 분량만 가져갑니다.
소녀는 지금, 가엾게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텅 빈 방 안, 소녀의 벗은 몸을 감싸고 있는 한 장의 담요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공간 안에서, 그녀는 여태껏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 안을 가득 메운 기분 나쁜 냄새와 쓰레기통 안에 버려져 있을 피 묻은 시트의 존재를 자각하면 할수록 그 악몽은 선명해지기만 했고, 몇 시간에 걸친 성찰 끝에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완전히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녀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소녀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 특히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어젯밤의 일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담요에 둘둘 말린 제 몸을 부둥켜안고, 자신을 이 상황에 처하게 한 모든 것을 저주했다.
밉다.
밉다.
그 사람이 밉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녀는, 점점 미쳐가는 자신의 정신을 한데 끌어모아 두 달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자신의 열 여덟 번째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고등학교 3학년의 마지막 겨울로.
↑↑↑위아래 장면은 이어지는 장면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교하고 없는, 텅 빈 학교는 어딘가 쓸쓸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수 개 무리의 소녀들이 여기저기 모여 그녀들만의 사소한 이야기를 속삭이고, 웃고, 때로는 우울해 하기도 하던 공간이었던 학교가 텅 비어버리는 것을, 아카시 세이카는 꽤 좋아했다. 그것은 그녀가 원래부터 시끄러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한데 모여 수다를 떠는 것보다는 제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소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최근에 와서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서류를 끌어안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그녀의 귀에 드디어 희미한 소리가 와 닿았다. 그녀의 목적지, 제 1 음악실에 놓인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에서 나오는 음악이다. 그리고 그 연주자는 중세 특유의 묵직하고 웅장한 음악을 즐겨 연주했다. 세이카는 그것이 그의 진중하기 그지없는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했다. 반면 그녀는 우울하다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애상적인 음악을 더 좋아했다. 예를 들면 지금 계단 위쪽에서 들려오는 곡처럼. 계단을 올라가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리듬에 맞춰 고요하고 사뿐사뿐하게 계단 끝까지 올라간 그녀는 제 1 음악실 문 앞에 멈췄다. 저 아래에서는 희미하게 들렸던 음악이 지금은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문을 열고 들어가,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 있을 커다란 등에 얼굴을 기대고 싶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이 연주를 조금만 더 듣고 있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결국 그녀는 연주가 끝날 때까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선택했다. 집중하고 있을 게 뻔한 그를 딱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 정도로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을 텐데.
텅 빈 복도의 싸늘함이 팔을 조금씩 얼어붙게 만들었을 즈음, 계속되던 음악이 멈추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다음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예. 점잖은 목소리가 반응했다. 조심스레 문을 연 세이카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리고, 뭐야, 너였나, 하는 표정을 짓는 그를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아, 그래. 들어와라. 마침 차라도 한 잔 할까 하던 참이었는데, 너도 마실 거지?”
“네, 감사합니다.”
사뿐사뿐 음악실 안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은 세이카는 피아노 너머 준비된 작은 찬장 안에서 차를 타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의 그는 한 치의 구김 없이 깔끔하게 다린 와이셔츠와 바짝 선이 들어간 감청색 조끼 차림이었다. 혼자 산 세월이 길어 옷은 전부 직접 다린다고 하는 남자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교사라는 직업은 모범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도 말했다. 제가 다려 드릴 수도 있는데요. 장난스레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귀한 집 아가씨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순 없지.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커다란 손을 떠올렸을 때 향기가 피어오르는 찻잔이 세이카의 앞에 놓였다. 오늘은 애플 티다. 나는 여기 시나몬을 가볍게 섞어 먹는 걸 좋아하는데, 네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군. 그렇게 말하는, 교양 있는 사람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세이카는 시나몬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가 주는 것이라면 맛있게 마실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찻잔을 감싸 쥔 세이카는 들고 온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이 일주일 간 졸업식 연주 때 쓸 곡을 응모 받았는데, 후보가 워낙 많아서 좁히기가 힘들었어요. 이 중에서 선생님이 몇 곡 고르세요.”
“……대부분이 사랑 노래로군. 대체 너희들은 내게 어떤 캐릭터를 기대하고 있는 거냐?”
“이제 곧 학교를 떠날 아이들이니, 조금 어울려 주셔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네 추천은?”
“뭐라고 말하기힘드네요. 학생회의 입장은 ‘전면적으로 선생님에게 맡긴다’라서.”
사실은, 당신이 연주하는 곡이라면 뭐든 좋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길고 듬직한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나열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달콤할 것이다.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그 안에 퍼지는 시나몬의 향기를 몸 한 가득 받아들이며 세이카는 남자를 향해 생긋 웃어보였다. 진지하게 리스트를 넘겨보던 그는 곧 셔츠 주머니 안에서 만년필을 꺼내 두세 개의 곡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리사이틀을 하는 것도 아니고, 두 곡 정도면 되겠지. 여기 있다. 서류를 받아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세이카는 서류가 아니라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보고 싶었어요.”
이 방 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계속 숨기고 있었던 진심을 털어놓자, 안경 너머의 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여긴 학교라는 것이다. 하고 달갑지 않은 말을 했다. 그럼에도 제 손을 놓지 않는 그를 향해 세이카는 다시 웃어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저와 선생님 단 둘뿐인데요. 유혹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비치는 그 목소리에 남자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손이 차군. 그는 가만히 세이카의 손을 끌어당겨 제 입술 가까이로 가져갔다. 겨울 추위에 시달렸던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숨결이 들어와, 세이카는 전신에 소름이 퍼져가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선생님은 모르실 거예요.”
그 말에 남자가 천천히 세이카의 손을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제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그리고 제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는 것을 느끼며 세이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남자의 품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상냥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녀는 이 품에 안겨 있을 때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꼈다.
선생님.
좋아해요, 선생님.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내어 말하고 싶은 마음을 끌어안고서, 세이카는 남자의 등에 팔을 둘렀다. 그의 듬직한 등을 세게 껴안자 그가 세이카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소중하기 그지없는 것을 어루만지는, 이 상냥한 손이 좋아서 죽을 것만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카시 세이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며, 남자- 미도리마 신타로는, 열 살 어린 제 연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었다.
❖ ❖ ❖
미도리마 신타로. 나이는 스물여덟. 직업은 음악 교사. 그는 자신이 일하는 학원의 유일한 남자 교사다. 예로부터 교사 외의 남성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만의 화원인 이 여학교는 초등부부터 고등부까지 수직으로 진학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다 완전 기숙사제인 탓에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남성이라는 존재에 상당한 환상을 품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친절하고 매너 있는 태도에 잘생기기까지 한 이십대 교사는 인기의 절정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도리마 신타로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상적인 왕자님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미도리마는 분명 이상의 왕자님과도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지만, 별자리 운세에 집착하며 럭키 아이템이라고 부르는 괴상망측한 물건들을 들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에게 환심을 품고 있었던 여학생이 ‘선생님이 그렇게 들고 다니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장장 10분 동안 오하아사라는 그 운세 프로그램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은 일화는 이 학교의 학생과 교사를 포함한 전원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미도리마 신타로의 인기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고, 그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고백하는 학생도 1년에 다섯 명 이상은 꼬박꼬박 나왔을 정도였다.
물론 그 학원의 모든 여학생이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미도리마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일명 ‘소수파’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그들은 보통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음악 수업을 듣지 않는 여학생들이다. 그녀들은 중등부 때부터 미술 수업을 듣는 것을 택한 이들로, 미도리마와 얽힐 레야 얽힐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오다가다 한 번씩 얼굴을 마주한 적은 있을 테지만, 미도리마의 가장 큰 인기 요인인 ‘매너’나 ‘친절함’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만큼 묘령의 남자 교사에 대한 동경을 품지는 않았다. 또 하나의 부류는 대부분의 여학생들과는 달리 남성에 대해 관심도 환심도 품지 않는 무리들이다. 이런 여학생들은 대부분 고등부부터 편입해 들어왔거나 남자 형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성에 대한 환상이랄 게 없는 여학생들에게 있어 자신들을 가르치는 남자 음악 교사가 잘생긴데다 성격도 좋은, 이상적인 ‘왕자님’이라는 점은 어찌 되든 좋은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아카시 세이카가 바로 그 부류에 속했다.
그녀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리 초등부 때부터 이 학교에 다니기는 했으나,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부대껴 보낸 소녀들과는 조금 달랐다. 명문가의 유일한 영애인 그녀는 정재계에 이름난 거물인 아버지의 뒤를 따라 여러 개의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고, 본의 아니게 수많은 남성들을 접하면서 그들에 대한 환상보다는 경멸이라는 감정을 먼저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어차피 사회에 나가면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대부분이 자기 자신보다는 아버지의 권력을 먼저 본다는 것을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뼈저리게 느낀 바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기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완전히 그녀의 관심 밖에 있는 존재였다. 그의 음악 수업을 들으면서도 그저 ‘괜찮은 교사’ ‘피아노를 잘 치는 편’ ‘들고 다니는 물건이 우스꽝스럽다’ 정도의 인식밖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어쩌다가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이런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그 계기는 2주일쯤 전 일어났던 아주 작은 사고에 있었다.
12월 중순, 2학기의 가장 큰 이벤트였던 학원제와 기말 고사도 끝이 나 바빴던 학생회 업무에서 대부분 해방된 세이카는 학생회장으로서의 마지막 일인 졸업식 준비에만 몰두하면 되었다. 마지막 일이라고는 해도 사실상 졸업식을 준비하는 것은 대부분 교사들인지라, 오히려 다음 학생회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이 더 바빴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 1년 간 방과 후가 되면 매일같이 가던 학생회실 대신 도서관을 찾게끔 되었고, 그간 학업에 바빠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도서관의 귀중한 책들을 읽는 것으로
방과 후를 보냈다. 입학 이래로 처음 누려보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런 오후를 보낸 뒤의 일이었다.
“으…….”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에 고통스레 눈을 뜨고 새하얀 천장을 보았을 때, 세이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희미하게 품기는 약품 냄새로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보건실이라는 사실을 겨우 눈치 챘을 정도였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 전후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런 감정에 휩싸여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제 일어났나.”
이 학원에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우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다. 세이카는 제 침대 옆에 앉아 악보집을 읽고 있던 미도리마 신타로를 발견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는 세이카를 앞에 두고, 미도리마는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면서 살짝 웃어보였다.
“보건 선생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 머리가 어지럽다면 바로 불러 주겠다는 것이다. 아니, 병원에 가 보는 게 좋을까?”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제가 왜 여기에 있죠?”
“기억 안 나는 거냐? 도서관 계단 앞에 쓰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도서관? 계단? 눈을 깜박이다가, 세이카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상황이 재조립되었다. 평소처럼 책을 빌려 가지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그녀는, 뜻밖에도 계단 위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렸다. 제 등을 세게 밀친 악의 가득한 손길에 대해 세이카는 완전히 무방비했고, 책을 놓치면서 완전히 균형을 잃고 그대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었다. 머리를 잘못 부딪친 탓이었을 게다. 그녀는 자신을 떠민 것이 누구인지,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우연히 도서관에 와 있던 미도리마에게 발견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막 일어나서 아직 어지러울 테지. 잠시만 더 누워 있으라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네요. 저는 이제 괜찮으니 선생님은 돌아가 보셔도…….”
“나는 괜찮다는 것이다. 어차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 혹시 남자가 옆에 있는 게 불안하다거나 하는 이유라면 다른 여자 선생님을 불러다 주겠다만.”
“아, 아뇨…….”
“그럼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만 여기 있겠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처음 발견한 게 나다 보니 걱정이 되어서.”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마는 세이카에게, 도로 누우라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결국 얌전히 다시 이불을 덮고 누운 세이카는, 죄송해요, 하고 짧게 말했다.
“괜찮다니까. 그것보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는 거냐?”
“아…… 네.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서.”
“그래, 무리도 아니지…… 어쨌든 좀 더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말이 나온 김에, 생일이 어떻게 되지?”
“네?”
“네 생일 말이다. 별자리를 모르면 럭키 아이템을 챙겨 줄 수가 없으니까.”
솔직히 말해 세이카는 그 순간,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눈앞의 교사가 오하아사라는 운세 프로그램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들은 바 있었고 그가 들고 다니는 온갖 물건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금방이라도 중세 음악사에 대해 열띤 강의를 할 것 같은 진지한 얼굴로 생일을 물어 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듬더듬 12월 20일인데요, 하고 제 정보를 말하고 말았고, 그것을 들은 미도리마는 사수자리로군, 하고 중얼거리며 제 가슴 주머니에서 꽂혀 있던 만년필을 내밀었다.
“오늘 사수자리의 럭키 아이템은 만년필이라는 것이다. 행운의 색은 녹색이고. 마침 내 만년필이 녹색이니, 이걸로 오늘 네 운은 문제없다.”
↑↑↑위아래 장면은 이어지는 장면이 아닙니다↓↓↓
그 다음 날 세이카는 음악실을 찾았다. 미도리마의 만년필을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그녀는 남의 물건, 그것도 상당한 고급품을, 아무리 상대 쪽에서 건네준 것이라고는 해도 하루종일 가지고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미도리마 신타로가 자리를 뜨고 없었기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덧붙여 세이카는 미도리마가 준 것이 단순한 만년필이 아닌 ‘럭키 아이템’ 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만년필은 이미 미도리마 신타로가 맹신하고 있는 문제의 ‘오하아사’와 연결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아카시 세이카는 점이나 운세라는 것에 인간의 운명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불특정 다수에게 들려줄 목적으로 정확성보다는 흥미 위주의 내용으로 구성해 놓았을 아침 방송 따위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그것을 건네 준 사람이 교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날 운세가 나빴던 자신을 염려하여 건네준 물건이 아니었다면, 세이카는 당장 그것을 기숙사 공용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되었든 아카시 세이카는 음악실을 찾았다. 미도리마 신타로를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당시의 세이카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문을 열자 문 너머로 들리던 것보다 더 커진 클래식 음악이 들리고, 그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섞였다. 팥 냄새 같았다. 화과자라도 먹고 있는 걸까. 아무리 음악 수업이 없는 시간이라고는 해도 교사가 과자와 함께 티타임이라니. 약간의 경멸 섞인 감상과 함께 음악실 안으로 들어선 세이카는 미도리마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주었다. 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자연스레 시선이 움직였던 것이다. 어제 양호실에서 읽던 것과는 다른 악보와 그 옆에 놓인 찻주전자, 세트인 듯한 옥색 찻잔.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담긴…….
“……풋!”
그 걸쭉하고 단 냄새로 가득한 액체가 무엇인지 눈치 챘을 때, 세이카는 미도리마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교양 없는 행동임을 뻔히 알면서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반사적으로 나와버린 웃음이었던지라 곧 입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테이블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냐?”
그리고 세이카에게 그런 교양 없는 짓을 하게 한 장본인은,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니, 오히려 세이카에 대한 걱정만 듬뿍 담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 모습이 간신히 억눌렀다고 생각했던 웃음의 스위치를 다시 눌러버린 것은 물론이었다. 결국 세이카는 입을 막고 있던 손 사이로 다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지라 대폭소를 터트리지는 않았지만, 한 번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쉽게 멎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소리죽여 쿡쿡 웃는 세이카의 모습에서 미도리마는 그녀가 무얼 보고 웃음을 터트렸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겸연쩍게 헛기침을 뱉은 그는 찻잔의 걸쭉한 액체- 달콤한 향을 잔뜩 풍기는 단팥죽을 깨끗이 비웠다.
“다 웃었으면 용건을 말해보는 게 어떠냐. 애초에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클래식을 들으면서 단팥죽을, 그것도 찻잔에 따라 마시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요…….”
“흥. 모범생으로 소문이 자자한 학생회장이 수업을 빼먹고 교실 밖을 돌아다니는 것만큼 놀랍지는 않을 걸.”
“어차피 기말 고사도 끝나서 자습만 하고 있는걸요.”
“진학반 학생들은 그 자습 시간에도 보통 공부를 할 텐데.”
“괜찮습니다. 전 대학엔 안 갈 거니까요.”
마지막 한 마디는, 세이카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다. 물론 그 속에 담긴 감정까지 대수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세이카는 그 목소리 속에 단 한 줄기의 미련이나 망설임도 담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교사인 미도리마에게 있어서는 그저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던 것 같다.
“난 네가 진학반 학생인 걸로 알고 있는데. 교사들 사이에서도 찬사가 흘러나올 정도의 모범생이라고. 게다가 3년 내내 전교 1등을, 그것도 만점으로 받아냈지. 대학에 안 가기엔 너무 아까운 조건 아닌가?”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이 학교의 교사 중에 널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다만.”
그럴 것이다. 이 학교 내에서 아카시 세이카의 인지도는, 어쩌면 학생들 사이에 인기 톱을 자랑하는 교사인 미도리마보다도 높은 편일지 모르니까. 아카시 세이카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별칭이 따라다녔다. 미도리마가 말한 것처럼 입학 이후로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천재소녀라거나, 초등부 때부터 학생회장 자리를 꾸준히 역임해 온 인재라거나, 그 유명한 아카시 가문의 영애라거나 하는 것들. 세이카 본인이 그 칭호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둘째 치고, 그녀는 그 칭호에서 단 한 순간도 자유로워 본 적이 없었다. 그래, 당연히 이 사람도 알고 있겠지. 아무래도 어제 계단에서 굴러떨어진다는, 자신의 인생에 전무후무한 꼬락서니를 보이고 만 상대여서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세이카는 미도리마의 그 말을 듣고서는 그다지 기쁜 기분으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대화를 단번에 끊어버리고,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에 싼 만년필을 꺼내 그대로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어제 빌려간 물건을 돌려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그럼 이만.”
“아, 잠깐만……,”
세이카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겠지. 미도리마는 당황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세이카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손목을 잡힌 순간 세이카는 반사적으로 정색한 채 미도리마의 손을 뿌리쳤다. 물론 그것이 교사에게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손을 뿌리친 뒤 미도리마의 놀란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사과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버린 세이카에게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미도리마 쪽이었다.
“미안하다는 것이다. 무례한 행동을 했군.”
“아, 아니에요…… 그건 오히려 제가.”
“아니. 아무리 학생이라고는 해도 과년한 아가씨의 손목을 마음대로 잡다니, 신사가 할 짓이 아니지. 게다가 방금 전엔 네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말을 한 것 같고.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학생인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미도리마의 모습에 세이카는 그의 손을 뿌리쳤을 때만큼이나 당황했다. 나도 고개를 숙이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실례했다고 말한 뒤 여기서 나가야 하나? 심지어 미도리마는 한 번 굽힌 허리를 절대 다시 펴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던 그녀의 몸을 움직인 것은 찰칵, 하고 테이프가 끊기는 소리였다. 다른 상황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면 요즘 세상에 카세트 테이프라니 은근히 구식이라는 감상 정도는 늘어놨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소리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초석이었다. 테이프가 끊기는 소리에 미도리마는 겨우 고개를 들었고, 그가 테이블 옆에 놓아둔 플레이어로 시선을 돌리자 세이카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저…… 그럼 전 이만.”
“기왕 빠져나온 거, 끝날 때까지 여기 있으라는 것이다. 게다가 다들 공부하고 있을 텐데, 자습 도중에 들어가면 민폐잖나.”
“하지만 선생님께도 폐가 될 것 같은데요…….”
“괜찮다. 시간이 남아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니까. 차를 줄 테니 잠시 앉아라.”
그 제안을 세이카가 차마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미도리마가 교사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굳이 하나를 더하자면 방금 전의 민망한 상황을 연출한 데 대한 죄책감 정도일까. 어쨌든 세이카는 미도리마가 앉아 있던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미도리마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를 준비하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나한테도 단팥죽을 주지는 않겠지, 하는 걱정과는 달리 잠시 후 미도리마가 내온 것은 은은한 향을 내는 붉은 액체였다.
“머스캣 티에 민트를 블렌딩한 거다. 입에 맞을까 모르겠군.”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안심한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마시는 걸 보고 웃음을 터트린 사람한테 단팥죽을 내주진 않아.”
어라? 의외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이카는 다시 쿡쿡 웃으며 찻잔을 입에 댔다. 홍차를 우리는 일반적인 온도는 90도 정도로 매우 높지만, 미도리마가 내 온 차는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세이카에게도 딱 적당한 온도였다. 설마 내가 뜨거운 걸 못 먹는 걸 알고 있었을 린 없고, 그저 우연일 뿐인가? 어쨌든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전신이 상당히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 미도리마의 발언에 발끈했던 것도 마치 없었던 일 같다.
“저……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아니, 내가 먼저 무례한 행동을 한 거니까. 대학 진학 건도 그래. 너는 너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테지.”
“아뇨…… 굳이 따지자면, 저는 가고 싶었지만 …….”
슬쩍 본심을 드러냈다가, 세이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진학 상담이라도 할 생각인가. 제대로 얼굴을 보고 대화한 게 고작 이틀째인, 자신의 담임도 아닌 음악 교사에게.
그러나 자신의 대응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세이카의 생각은, 슬쩍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고 있는 미도리마의 얼굴에 시선이 닿았을 때 눈 녹은 듯 사라져 버렸다. 무엇이든 좋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보라는 듯한, 세이카만을 빤히 바라보는 미도리마의 눈동자가 그 원인이었다.
“……아버지께서 반대하셔서.”
결국 세이카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그 이야기를, 그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미도리마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어쩌면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대상이 우연히 눈앞에 앉아 있었던 미도리마 신타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번 입을 열고 나니 끊임없이 말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저희 가문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선생님께선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일본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지. 하지만 왜 반대하시는 거지? 대학에 가는 건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될 텐데.”
“……아버지는 제게 회사를 물려주실 생각이 없으시거든요.”
아주 어릴 적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던가. 입학식 전날 세이카는 아버지의 입으로부터, 자신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의지가 전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난공불락의 여학교. 대부분의 학생들이 새장 속에서 자란 아가씨들인 그 학교에 세이카를 밀어 넣으면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회사 운영이란 것은 매우 복잡하고, 또 힘든 일이지. 여자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너는 그에 걸맞는 능력을 지닌 남자를 만나, 그 뒤를 맡길 수 있을 만한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것이 아카시 가문 영애로서의 네 임무다.
그 말에 세이카는 아버지의 앞에서는 일단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방으로 돌아와서는 아주 많이 울었다. 어린 나이에도 그 말은 무척 충격이었던 것이다. 모욕적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것도 거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이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카시 가문의 후계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어른들은 물론이고, 침대에서 거의 일어나지 못했던 어머니조차도 세이카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오직 아버지만이 세이카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좌절했더라면 편했을 것을, 세이카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그녀가 여태껏 살아온 짧은 인생 속의 자부심이 너무도 강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리석게도, 자신이 노력한다면 아버지도 언젠가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친구들과 교류를 쌓는 시간,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공부했다. 학생회장을 역임한 것도 자신은 이 정도까지 사람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카시 세이카의 9년 간의 노력은 아버지의 한 마디에 좌절되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에 아버지와 진학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진학은 안 해요.”
그럴 필요는 없다. 네가 졸업하면 적당한 신랑감을 찾아 볼 생각이니까. 선택은 일단 네게 맡겨두겠다만, 네 의무는 잊지 말아라.
아버지의 그 말은 아카시 세이카가 여태까지 살아 온 인생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아버지는 세이카를 자신의 딸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을 것이다. 그저 아카시 가문을 번영시키기 위한 태로서 키웠을 뿐. 그것을 알게 되자, 이젠 어찌되든 좋다는 생각만 들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도 아버지에게는 인정받지 못할 것이며, 어떤 반항을 해도 아버지는 들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카시 가문만을 위해 살아온 몸이라면, 평생 그런 인생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아쉬움 외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된 그녀는 아버지의 그 말을 고개 끄덕여 수긍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까운 이야기로군.”
“담임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뭐, 사정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실은 나도 그랬다는 것이다.”
“선생님도요?”
고개를 끄덕이며 미도리마는 찻잔에 다시 단팥죽을 따랐다. 제법 식어버린 그것은 방금 전과 같은 달콤한 냄새를 더 이상 풍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세이카 자신이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상하지. 방금 전에는 저 모습이 그렇게 우스웠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세이카는 멍하니 미도리마가 찻잔 속의 단팥죽을 한번에 마셔버리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난 어렸을 때 의사가 되고 싶었지. 대학도 의대에 들어갔었다는 것이다.”
“의대에……? 하지만 지금은 교사가 되셨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 하고 세이카는 입을 막았다. 방금 전 자신이 한 무신경한 말에 비하면, 단팥죽을 보고 웃은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정도의 실례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물론 미도리마는 세이카를 탓하지 않았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조차도 그저 보고 넘겼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의사를 지망했던 청년이 음악 교사가 되어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 겪어온 시간의 괴로움을 능히 짐작하게 해 줄 수 있었다. 사과할까 하다가, 세이카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는 것을 택했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아 사과해 봐야 어차피 네 탓이 아니라는 말만 들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교사가 되었지만, 그것을 언제까지고 후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 사정이 어려웠던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의 삶에 인사를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꽤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너도, 그런 삶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런 삶이란 건 어떤 삶인 걸까요?”
“나야 알 수 없지. 선택하는 건 네 자신이니까. 그래도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미도리마는 세이카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제 정수리를 덮은 큰 손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것에, 세이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행동의 갑작스러움에 당황한 것 역시 분명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누군가가 제 머리를 이런 식으로 쓰다듬은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약해 죽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던 어머니는 물론이고, 자신의 딸에게 일정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았던 아버지 역시.
아니, 아버지는 오히려-
“……읏.”
순간 싫은 것을 떠올려 버려, 세이카는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 남자에게 그날 있었던 것과 같은 욕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도, 속이 울렁거려서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이카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미도리마는 황급히 머리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세이카에게 시선을 맞춘 채 무릎을 굽혀 앉은 미도리마는 입을 손으로 막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세이카가 진정할 때까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속이 좀 가라앉았을 즈음, 괜찮으냐,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세이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도리마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내가 또 무례한 짓을 해 버린 것 같군. 미안하다는 것이다. 여동생이 있어서, 그 애에게 하던 버릇이 나온 모양이야. 마침…… 네 나이이기도 하고.”
“……오빠라니, 선생님께 어울리네요.”
“그래? 그럼 오빠 노릇을 좀 해 볼까.”
그렇게 말하며 팔을 걷어부친 미도리마는, 오빠 노릇? 하고 의아하게 자신의 말을 따라하는 세이카를 지나쳐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의자에 앉은 그는 슬쩍 세이카를 바라보았다. 그 행동은 마치 뭔가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뜻을 읽어내자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보다도, 가장 먼저 그 곡이 떠올랐다.
“그럼…… <장미의 아다지오> 를.”
“음? 하지만 그건 연탄곡인데?”
“괜찮아요. 제 2 피아노만이라도.”
들어보고 싶었으니까.
세이카가 생략한 말을 미도리마가 들었을 리는 만무했으나, 그는 괜찮다는 세이카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흐음, 하고 잠시 목을 울린 그는 눈을 감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첫 음을 시작으로 미도리마의 피아노 연주가 세이카의 귀를 스쳤다. 그 뒷모습에서 세이카는 전날 밤의 꿈을 떠올렸다. 무대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자신과, 그 옆에서 피아노를 치던 미도리마 신타로. 흑백영화처럼 무미건조했던 세계에 연주가 색을 가져왔다. 제 귀로 흘려들어오는 제 2 피아노의 경쾌한 선율을 듣다가, 세이카는, 방금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단팥죽의 단 냄새가 다시 제 후각을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그 향기에 자극받아, 세이카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주에 집중하는 미도리마의 등 가까이로 한 발자국씩 다가가면서, 그녀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말이 제 목 너머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다.
“……선생님이 정말 제 오빠였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랬으면, 아버지가 나를 단순한 태로 키우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이카에게는 상당한 후회를 담은 그 말이, 미도리마에게는 어떻게 들렸던 것일까. 그 말에 미도리마는 연주하는 것을 멈추고 세이카를 돌아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진지한 얼굴 너머로 아주 격렬한 감정을 일순 보였고, 불운하게도 아카시 세이카는 그 감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불행에 빠져 있었고, 그 불행을 걷어 줄 것 같은 연주가 중지된 것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으니 그 사이에 미도리마가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하기로 결정했는지 세이카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난…… 네 오라비라는 위치는 사양하고 싶다는 것이다. 내게 아카시 가문의 후계자라는 위치는 너무 무겁거든. 하지만…….”
미도리마는 천천히, 방금 전까지 건반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을 세이카에게로 뻗었다. 그 손가락이 제 손을 감싸고 가볍게 끌어들여, 이윽고 힘주어 잡는 순간까지도 세이카는 그 행동의 의미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카시 세이카의 마지막 실수였다.
“하지만 너는 지금까지 그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짊어메고 왔겠지. 대견하다는 것이다. 장해.”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마 신타로는 처음으로 아카시 세이카의 앞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카시 세이카는 그 미소를 본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이 남자에게 흡수당할 것만 같은 예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날부터 아카시 세이카는, 파멸을 향한 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갔던 것이다-
같이 나오게 되어 있었던 우시오이 신간은 사정상 펑크입니다(mm)
기대해주셨던 분들께는 죄송합니다(mm)
수량조사는 이 포스트의 댓글로 구매 권수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이 때 권수 앞에 #42를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량조사 마감은 12월 21일(서코 전 주 일요일) 24시입니다.
단 그 시간에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마감 선언이 올라오기 전까진 계속 받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