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있어, 세상은 아직.>
이즈미 이오리 x 나나세 리쿠
(+야마소고, 나기미츠)
A5 떡제본 / 116p / 8000원
+본편의 세계관을 담은 책자가 동봉될 예정이었지만 인쇄비의 압박으로 무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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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링크의 설정집, 특히 캐릭터 설정은 본편을 읽으신 뒤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게임 속의 극중극 <아이나나 경찰> 설정을 기반으로
세계관을 매우 다크하게 재구성한 내용의 AU입니다.
*테러조직 'code:256'을 쫓기 위해 I-7 거주구로 온 형사 이오리가
I-7 거주구 신입 경관 나나세 리쿠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상당히 어두운 내용입니다.
평범하게 노래부르는 애들 갖고 뭐 하시냔 태클은 받지 않는다.
*몇 명의 대사가 상당히 위험합니다만, 일단 전연령입니다.
*메인 커플링은 이오리쿠입니다만 야마소고, 나기미츠 요소도 만만찮게 강합니다.
타커플 뉘앙스가 풍기는 것이 싫으신 분들의 경우 구매를 권장드리지 않습니다.
*회지 샘플
*각 샘플은 완전히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0.
오늘은 날이 덥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즈미 이오리는 코트를 벗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연한 갈색의 트렌치코트는 20년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형사 드라마를 빠짐없이 시청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디자인이었다. 다만 이 도시에 그런 드라마를 즐겨 봤던 사람은 얼마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오리의 코트는 그의 신분을 숨기기에 적절한 복장이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오리가 입고 있는 코트 밑에는 권총이 숨겨져 있었다. 날이 더워진 탓에 정장 윗도리를 걸치지 못하고 셔츠 위에 그대로 권총 홀스터를 찼기 때문이다.
요 며칠 동안 이 도시에는 거세게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겨우 잦아든 것은 어제 일이었는데, 비가 그치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맑고 더운 하늘만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에 얼굴을 잠시 가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다 말고, 이오리는 건물로 들어섰다. 이 도시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안전지대, 즉 병원이다. 이 병원은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병원 중 하나였다. 국가 관리 대상이 되지 않는 다른 병원들은 사실상 병원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해도 좋다. 국가에서 신분을 보증해 주지 않는 의사와 간호사들로 가득 차 있고, 입원해야만 하는 사정을 밝힐 수 없는 환자들이 입원 서류를 내고 청구서를 받아가는 병원은 요 몇 년 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당연하게도, 일반인들은 그런 병원에 입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입원하는 환자가 생긴다 해도 옆자리에 누워 있는 험상궂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반면 국가가 관리하는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금액을 필요로 한다. 하루하루 목숨 부지하며 살아가는 데 바쁜 일반인들이 낼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이런 병원에 돈 걱정 없이 입원할 수 있는 것은 병원과 마찬가지로 국가 관리를 받고 있는 인물들, 대표적으로 이오리와 같은 경찰 조직의 일원들 정도다. 이오리가 오늘도 발걸음을 옮기는 병실에도 그런 사람이 입원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았어도 그는 이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입원시키기 위해 여러모로 힘을 쓴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오리는 그것이 구역질나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이즈미 형사님.”
병원으로 들어서는 이오리의 뒤로, 귀에 담는 것만으로 이를 갈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오리는 굳이 그와 시선을 마주해 주었다. 이 병원의 의사에게 지급되는 유니폼을 입고, 히라가나로 쓴 명찰을 목에 달고, 품에는 캐릭터 인형을 안고, 마치 ‘병원’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새하얀 이미지를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겉모습만 보기에는 아무도 해칠 수 없을 것 같은, 새하얀 천사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남자는 이오리의 적의 가득한 시선을 받자마자 황홀해 죽겠다는 표정을 일순 지었다. 텅 빈 병원 로비에는 이오리와 남자 외의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계속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어도 상관없었겠지만, 남자는 금방 표정을 바꾸었다. 그것이 그 행위를 목격한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이오리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웃는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오리는 형사였고, 상대는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였다. 즉 국가가 보증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게다가 그렇지 않더라도 이 남자에게 손을 대면 곤란해지는 쪽은 이오리다. 그 사실만을 버팀목으로 삼아 전신에 들끓는 폭력충동을 억제하려 애쓰는 이오리에게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의 머리에서 살짝, 약품 냄새가 났다. 거슬리는 냄새였다.
“오늘도 병문안 오신 거예요? 정성이시네요.”
“불안해서 견딜 수 있어야지 말입니다.”
“또 그런 소릴 하시긴. 여기 입원해 있는 한은 절대로 안전해요.”
“글쎄요. 제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다지 안전해 보이지 않는군요.”
명백히 도발하려는 의지가 담긴 말에도 남자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 심기를 거스르면 안 돼요.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의미를 담은 남자의 웃음이 이오리의 도발을 이겼다.
“너무 무서운 표정 짓지 마세요. 아이들이 보면 놀란답니다.”
“어차피 그 사람 외에 입원 환자라곤 없을 텐데요.”
“그렇게 하려고 힘을 좀 쓰셨죠. 덕분에 전 일이 없어서 놀아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만일 이들의 대화를 멀리서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병원에는 아주 중요한 환자가 입원해 있고, 그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이오리가 병원 측에 이런저런 수를 쓴 것이다, 라고. 하지만 그 추측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즉 이오리가 병문안을 온 사람은 이 병원에 있어서도 이 나라에 있어서도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 이오리는 그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럴 권리는 이오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병원에 그 환자 외의 사람이 입원해 있지 않은 것은, 그래, 악취미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일이 없으시면 퇴근하지 그러십니까.”
“안 돼요. 오늘은 목요일이니까요. 제 계약 규정에는 주말을 제외하고 꼬박꼬박 출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답니다. 안 지키면 잘려요.”
“출근이요? 또 진료실에서 작당을 할 생각이신 거겠죠.”
“작당이라니, 너무하시네. 저한테는 소중한 시간이에요. 너무 바쁘셔서 얼굴도 못 보는 일이 비일비재한걸요.”
“어차피 주말에는 매일 만날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것은 이오리의 말에 찔리는 구석이 있거나, 곤란한 점이 있거나, 당황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말끝을 흐린 남자는 입을 가리고 몸을 숙였다. 소리도 없이 조용히 웃고 있는 것이다. 이오리는 차가운 눈으로 남자가 황홀함에 가득한 웃음을 그칠 때까지 그를 응시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남자는 다시 이 병원에 어울리는 모범적인 의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 이만 서류 정리가 있어서 실례할게요. 빨리 회복되면 좋겠네요.”
남자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의사로서 병문안을 온 사람에게 남기기에 충분한 말이었지만, 이오리에게는 그것이 수준 높은 비꼼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말한 그 대상을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게 한 당사자가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다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이오리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자,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인영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일순 그의 얼굴에 드러났던 경계의 기색은 상대가 이오리라는 것을 파악하자 곧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뭐야, 너였냐. 일찍 왔네.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이오리의 형, 이즈미 미츠키는, 이오리가 인사 대신 건네준 도시락을 받아들고 기지개를 켰다. 열 시간 가까이 여기 앉아만 있어 피곤함이 역력한 기색이다.
“뭔가…… 변화는 있었습니까.”
이오리의 질문에 미츠키는 고개를 저었다. 슬쩍 바라본 침대 위에는 수 개의 관을 몸에 연결하고 코에서부터 시작해 턱까지 덮고 있는 인공호흡기를 단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한 명의 청년이 누워 있었다. 이 모습만 보면 누구도 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전거 한 대에 의지해 이 거주구 전체를 돌아다니며 마을의 안전을 지키겠다고 눈을 빛내던 성실한 순경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이오리는, 미츠키의 안쓰러운 시선을 외면한 채 침대 옆에 앉아 축 늘어진 청년의 손을 붙잡았다. 차갑다. 형사 일을 하면서 몇십 구는 넘는 시체를 보아왔지만, 분명 숨이 붙어 있음에도 이 존재는 이오리가 보아 온 그 어느 시체보다 차갑게 식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 밖에 나가서 먹을게. 그렇게 말하며 미츠키가 자리를 피해 준 것은 분명 이오리의 마음을 배려해서였을 것이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오리는 제가 감싸 쥔 손 위로 얼굴을 숙였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건가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묻고 싶은 것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내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내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빨리…… 빨리 깨어나 주십시오.”
청년의 이름은 나나세 리쿠.
I-7 거주구의 순경으로, 얼마 전 일어난 테러 사건에 휘말려 의식을 잃은 채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즈미 이오리의-
1.
이즈미 이오리가 I-7 거주구에 발을 들인 것은 얼마 전 경시청으로 날아온 한 통의 팩스가 원인이었다.
발신자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문제의 팩스는 자신이 I-7 거주구의 거주자이며, 얼마 전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수상한 자들이 모여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내용이었다. I-7 거주구는 빈말로도 아무 문제없는 도시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다른 거주구에 비해서는 범죄의 발생률이 낮은 편이었다. 일단 국가 보증이 붙은 병원이 세워져 있는데다, 전국에 몇 개 없는 경찰서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팩스를 보낸 사람도 처음엔 그 무리들이 다른 거주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떠들던 내용 중 몇 가지-T-3 거주구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사건이라거나, R-2 거주구에서 일어난 은행 폭발 사건 등등-가 며칠 뒤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두려움에 연락을 했다는 모양이다.
자연스레 경시청은 발칵 뒤집혔다. 팩스에 실려 있는 각종 사건들은 실행 인원도 그 규모도 제각각이었지만 전부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통점이란 다름아닌 주모자다. 조사 끝에 그 사건들을 주동한 것이 일본 전국을 들썩이는 대규모 테러 조직 ‘code:256’이었음이 판명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제보자가 들었다는 그 음모는 ‘256’에서 저지를 테러 계획을 미리 짜고 있었던 것이다- 라는 추측이 경시청 내에 팽배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며칠이 더 지나자 자연스레 I-7 거주구에 ‘256’의 본거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시사되었다. 그로부터 또 며칠 뒤엔 상부 회의를 거쳐, I-7 거주구에 수사본부를 세우고 대대적인 수사를 거쳐 이번에야말로 ‘256’을 소탕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그, 이즈미 이오리는, 그 수사본부의 일원으로 선택된 형사 중 한 사람이었다.
이즈미 이오리라는 형사를 표현하는 단어로 ‘엘리트’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약관 20세의 나이로 경찰채용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해, 그 나이에는 이례적일 정도로 빨리 경시청에 들어와 미해결 사건 수 개의 해결에 도움을 주고 그보다 많은 수의 사건을 방지한 전적이 있었다. 그가 해결해 온 사건들 중에는 ‘256’이 얽혀 있는 사건도 몇 개 있었다. 그러니 수사본부의 총 책임을 맡은 타카나시 오토하루 경부가 누구보다 먼저 이오리를 수사본부의 일원으로 택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자연스레 이오리의 파트너이자 그의 형인 이즈미 미츠키 형사 역시 수사본부에 투입되었고, 이전 몇 개의 사건에서 이오리와 손발을 맞춘 적이 있었던 경찰 특수부대 ‘m.p’에서도 소대장인 요츠바 타마키와 함께 수 명의 지원 병력을 보내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이즈미 이오리는 I-7 거주구에 발을 들였다.
I-7 경찰서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수사본부의 설립을 무척 영광으로 여기는 듯, 자신보다 삼십 년은 어릴 이오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만약 이 수사본부의 활동이 성과를 거둬 ‘256’을 체포하게 된다면 국가에서 이 거주구에 제공할 것이 분명한 각종 혜택을 누리고 싶다는 본심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보기 싫어 이오리는 수사본부를 설치하는 일을 미츠키에게 맡겨두고 서 안을 둘러보기 위해 자리를 이탈했다. 경찰서장은 끝까지 이오리를 따라다니며 서를 안내해 주고 싶어 했지만, 이오리가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눈치 챈 미츠키가 적당히 커트해 준 덕분에 이오리는 자유가 될 수 있었다.
“오늘부터 이즈미 형사님의 안내 및 수사 보조를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 자유라는 말은 틀렸다. 이런 혹이 붙어버렸으니 말이다.
수사본부를 빠져나온 이오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제복 경관은 경찰서에 일괄 지급되는 새파란 제복이 어색할 정도로 어린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동안이라면 사실 이오리의 형인 미츠키가 더했지만-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이오리 쪽을 형으로 생각했으며, 사실은 미츠키가 이오리보다 다섯 살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호들갑을 떨며 놀라곤 했다-눈앞의 제복 경관 역시 소년으로 보이기에 충분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오히려 미츠키보다 훨씬 어리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부터 대규모 수사에 협력하게 된다는 긴장감보다는 경시청의 형사를 처음 본다는 데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물든 그 순진하기 그지없는 얼굴 탓이었을 게다. 실제로 I-7 같은 작은 거주구에 경시청의 수사본부가 설치되는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신기한 동물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은 어떻게 해줄 수 없나. 불만을 품으면서도 이오리는 단정한 자세로 그의 경례에 답해주었다.
“이번 수사를 위해 경시청에서 파견된 이즈미 이오리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어, 그러니까.”
“나나세입니다! 나나세 리쿠!”
“예, 나나세 리쿠 씨.”
“이런 큰 사건에 협력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성급하군요. 영광이 되는 건 수사가 성과를 거뒀을 때입니다.”
“아, 그렇군요! 부족하지만 열심히 할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대체 ‘잘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해야 성이 차는 걸까, 이 사람은. 그런 불만을 이오리가 품은 다름이 아니라, 이 거주구에 팽배한 안일한 분위기에 질렸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전국에 각종 크고 작은 테러를 일으켰던 대규모 범죄 조직을 쫓는 일인데도 이 경찰서 내에는 긴장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이득만 생각해 보기 흉할 정도로 비굴해지는 경찰서장이나,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글생글 웃기만 하고 있는 이 제복 경관이나. 하아, 하고 이오리가 짧은 한숨을 쉬자 리쿠도 겸연쩍었는지 그 때까지도 유지하고 있던 경례 자세를 풀었다.
“그럼 서 안을 안내해 드릴게요.”
“아뇨, 됐습니다. 구조도는 이미 외워뒀으니까요.”
“어, 하지만 서장님이 안내해 드리라고…….”
“됐다고 하지 않습니까. 서장님껜 제가 알아서 말할 테니, 나나세 씨는 자기 일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만 제 오후 일은 이즈미 형사님을 안내해 드리는 일인걸요.”
우물쭈물하고 있는 리쿠를 보고 있자니 더 짜증이 났다. 참 한가한 소릴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거주구의 범죄 발생률이 낮은 편이라고는 해도 테러 단체가 잠입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전혀 위기감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애당초 이오리 한 사람을 안내한다고 경관을 한 명 붙여줄 여력이 있다면 좀 더 거주구 순찰이라던가에 활용하는 게 낫지 않은가. 이래서야 수사본부를 설치하기로 한 상부의 판단이 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런 이오리의 불평불만이 속마음을 비집고 나와 얼굴에까지 올라온 것인지, 이오리의 시선을 마주한 리쿠는 대놓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배속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네? 저요?”
“……여기 나나세 씨와 저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로 딱 3개월이 됩니다!”
그제야 이오리는 이 불합리한 인선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본청에서 사람이 내려왔으니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고, 무시하자니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니 일단 신입이나 붙여 놓고 보자는 생각이었겠지. 서장의 안일함에 다시 한 번 치를 떨며 이오리는 이마를 짚었다.
“할 일이 없으면 순찰이라도 도는 게 어떻습니까?”
이오리가 그렇게 제안한 것은 한 마디로, 혼자 있고 싶으니 제발 밖으로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리쿠는 이오리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것인지, 아하,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벽에 걸려 있는 열쇠를 빼들어 하나를 이오리에게 건넸다.
“……뭡니까, 이건?”
“네? 자전거 열쇠인데요.”
“이걸 왜 제게 주는 거죠?”
“어, 순찰 나가시는 것 아니었나요?”
그건 당신들 같은 제복 경관의 일이다- 라고 쏘아붙이려던 이오리는, 곧 입을 다물었다.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리쿠의 눈이 지나칠 정도로 순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배속 3개월 차라니 아직 모르는 게 많아도 이상하지 않지. 그런 사람에게 일일이 화를 내는 건 에너지 낭비다. 가라앉히자. 마음을 가라앉히자. 눈앞에 있는 건 어린애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런 자기암시를 되풀이하며, 이오리는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청년에게서 고집스레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이 사람과는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지 않다. 적당히 어울려 주고 물리쳐야지.
이렇듯, 이즈미 이오리의 나나세 리쿠에 대한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
그 때는, 나나세 리쿠에게 이런 마음을 품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큭……!”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고 벽에 기대자 미츠키가 걱정스런 시선을 던졌다. 괜찮아? 좀 쉴까?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형의 부축을 받아 바닥에 앉은 이오리는 방금 전 그들이 지나온 길에 쓰러져 있는 몇 명의 남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대충 세어 봐도 스무 명 이상이다. 이 장소, 그러니까 I-7 거주구 외곽에 위치한, 폐기된 전철역이 ‘code:256’이 마련한 무대인만큼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장소의 가장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생명이 풍전등화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츠키가 황급히 이오리를 다시 부축했다. 얼핏 보이는 표정이 걱정으로 가득하다. 이오리의 형이자 파트너로서 이오리가 무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가야만 한다.
입고 있던 코트를 찢어 만든 임시 붕대로 피가 흐르는 어깨를 대충 지혈하고 나서, 이오리는 리볼버 탄창에 총알을 보충했다. 방금 전 쓰러뜨린 이들이 저마다 이오리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탓에 총알만큼은 부족하지 않다. 다행히 이오리는 사격실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보통 한 번 권총을 겨누면 급소를 꿰뚫어 상대를 무력화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이오리와 미츠키의 목숨은 그 사격 실력 덕에 부지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 여기는 M3…… 아, 타마키.”
미츠키가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무전을 받는 것 같았다. 이오리의 이어폰은 방금 전 이오리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온 탄환에 튕겨 날아갔다. 또 그들과 함께 돌입했던 형사들은 전부 쓰러졌다. 이 상황에서 미츠키와 떨어지면 m.p.의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다행히 m.p.는 이 공장의 반대편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다만 목표물은 그 장소에 없었으므로, 자연히 이오리와 미츠키가 향하고 있는 곳에 목표물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 지금부터 여기 지원을 부탁해. 주변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해서 오고. 어? 나랑 이오리 말곤 전멸이야. 빨리 오는 게 좋겠어.”
미츠키는 어느새 자신을 코드네임으로 부르고 있지 않았다. 공과 사가 언제나 명백한 형이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는 이 상황을 꽤나 위기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위기는 이오리의 목 역시 조르고 있었다. 총알은 충분하고, 사격 실력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지쳐 있었다. m.p.의 지원이 없다면 여기서 전멸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앞에 대체 몇 명의 적이 있을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
그리고 그런 결론을 내린 것과 동시에,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신을 새까만 바이크 슈트로 두른 채 헬멧을 쓰고, 마치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외견의 총을 든,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적의만큼은 전혀 우습지 않은 장신의 남자가 혼자 서 있었다.
“그대들이 여기까지 도달한 것을 놀랍게 생각합니다.”
그 적의에 비해 유난히 정중한 남자의 목소리는 정말로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목소리에는 여유가 담겨 있었다. 당신들 두 사람 정도라면 쉽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 여유로 보나, 단신으로 모습을 드러낸 점으로 보나, 어딜 봐도 뒤에 쓰러져 있는 잔챙이들과는 격이 다르다.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미츠키가 이오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뒷길을 통해서 먼저 가.”
“형?! 무리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혼자서!”
“저쪽도 혼자잖아.”
“못 느끼시는 겁니까? 어딜 봐도 위험합니다!”
“너야말로 우선순위를 착각하지 마. 메일에는 네가 그 자리에 도달하지 못하면 인질의 목숨은 없다고 적혀 있었어. 당연히 내가 남아야 돼.”
미츠키가 말하는 ‘메일’이란 핸드폰 메일의 형태를 빌린 예고장을 말한다. 거기 적혀 있던, 사람을 놀리는 듯한 정중한 문장을 떠올리고 이오리는 이를 갈았다. 미츠키의 말은 정론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형이자 파트너인 미츠키를 남겨두고 훌쩍 자리를 뜰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인질로 붙잡혀 있는 이 역시 이오리에게 있어서는 미츠키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다. 그 딜레마에 끝까지 망설이는 이오리의 눈에, 그들의 앞에 버티고 서 있던 남자가 몸을 슬쩍 비켜주는 것이 보였다. 과장된 동작으로 제 뒤에 있는 철문을 가리킨 남자는 의아해하는 그들 형제를 향해 웃어보였다-헬멧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러했으리라-. 그런 남자를 위해 비꼬는 듯 웃음을 터트린 것은 미츠키 쪽이었다.
“어째 순순히 통과하게 해 줄 눈치다?”
“Exactly. 단, 갈 수 있는 것은 이오리 형사님 혼잡니다.”
“그랬다가 윗분한테 미움 사면 어떡하게?”
“Non. 저는 마스터의 부하가 아니고, 그에게 명령을 받는 입장도 아닙니다. 또 저라는 전력을 잃으면 곤란한 것은 마스터 쪽입니다.”
“꽤나 실력에 자신이 있으신 모양이네.”
“한 번 체험해 보시겠습니까?”
“그거 좋지. 자, 이오리. 어서 가.”
“형!”
“망설이지 마! 넌 그 녀석을 구하겠다고 다짐했잖아!”
처음으로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고, 미츠키가 이오리를 노려보았다. 형의 결연한 눈동자는 이전에도 몇 번씩 보아오던 것이었지만, 오늘의 그것에는 평소와는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오리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안다. 그것은 애절함이었다. 각오였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동생을 먼저 보내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겠다는, 정의로운 자 특유의 각오.
“알았지? 후회할 일 만들지 마.”
“하지만 형이…….”
“걱정 끄셔. 나는 그리 쉽게 죽어 주지 않아. 알잖아.”
미츠키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렇다. 이즈미 미츠키는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 이오리가 자잘한 상처투성이인 것에 비해 미츠키의 몸에는 그다지 큰 상처가 없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결국 이오리는 마음을 굳히고, 남자가 가리키는 복도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오리의 어깨 너머에서 권총을 겨누고 있는 미츠키를 경계해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건 상관없었다는 것인지, 남자는 제 옆을 지나는 이오리를 보면서도 그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뒤에 서 있는 미츠키를 한 번 쳐다본 뒤, 이오리는 복도 끝으로 펼쳐진 어둠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돌아보지 않고 달려야만 했다. 돌아보게 된다면 결심이 흐려져 버린다. 이 끝에 있는 사람보다 형을 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오리는, 이즈미 이오리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제 모든 신경을 자신이 구출해야 할 사람에게 쏟았다.
제발.
제발, 무사해 주세요.
‘나나세 씨……!’
2.
최악이었던 첫인상이 바뀐 건 바로 당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순경님, 오늘도 순찰 도세요? 수고 많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요즘은 별일 없으세요?”
“어마, 리쿠 군. 오늘 비 온다더라. 우비 챙겼니? 하나 빌려줄까?”
“서에 가면 준비되어 있어요! 고마워요, 아줌마!”
“여어, 나나세! 전에 가르쳐 준 식당 정말 맛있더라. 다음에 내가 거기서 밥 살게. 비번 잡히면 전화해!”
“지갑 사정 괜찮아? 무리하는 거 아니지? 그럼 기대한다.”
“매번 공사현장까지 와서 신경 써 주시고, 감사합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예산 문제도 덕분에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고요.”
“다행이다- 앞으로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상담해주세요!”
이상할 정도로 밝은 분위기의 거주구다, 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거주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의 풍경, 거리 곳곳에 심어진 나무나 화려한 꽃이 피어 있는 화분들 덕에 피어나는 싱싱한 분위기, 일반 거주자들에게 주어지는 고된 육체노동을 웃는 얼굴로 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길을 걸을 때마다 그들- 주로 앞서서 걷고 있는 나나세 리쿠에게 던져지는 밝은 인사가 그렇다. 마치 이 거주구의 거주자들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은 기세로, 리쿠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꼭 짧게 대화를 하고 지나갔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리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임 3개월 차의 경관이 갖기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인맥이다.
“발이 넓군요. 순찰할 때마다 매일 이런 분위기입니까?”
하고 이오리가 조심스레 의문을 표하자, 리쿠는 조심해서 질문한 보람이 없을 정도로 산뜻하게 그 의문에 답을 표해주었다.
“제가 이 거주구 토박이거든요! 일곱 살 때 왔으니까 15년은 됐네요. 서에 들어가는 게 정해졌을 때 주민 명부 보고 하나하나 인사드리러 다녔더니 다들 점점 이름을 기억해 주시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그게 기뻐서 막 이것저것 도와드리고 있어요. 방금 전 공사현장에서 만난 하야시 씨는 예산안 요청서 작성을 어려워하셔서 수속 밟는 걸 도와 드렸구요, 꽃집 운영하는 시오미 씨는 서 근처 보육원에 다니는 따님이 있는데, 운영이 바쁘셔서 데리러 갈 시간이 안 난다기에 시간 날 때마다 대신 가곤 했어요. 또 생선가게 아줌마는 어머니랑 단둘이 사시는데, 그 할머님이 허리가 많이 불편하신지 매번 집에만 계신대요. 그래서 쉬는 날이면 말동무 하러 가는데, 덕분에 생선 엄청 싸게 사요.”
리쿠가 덧붙인 말은 이오리로선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솔직히 말해 어찌되든 좋은 점이었지만, 주절주절 자신의 활약상을 늘어놓는 표정에는 묘하게 긍지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노력이 거주구의 평화에 아주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듯한. 하지만 그것은 경시청에서 온‘높으신 분’인 이오리에게 자신의 실적을 강조하기 위한 말투는 아니었다.
“……마치 칭찬받길 좋아하는 어린애 같군요, 당신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 버린 것이 부끄러워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이오리의 모습에도 리쿠는 고개를 갸웃했을 뿐 굳이 무슨 말을 했는지 추궁해 오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가 없다기보다는, 이오리 같은 윗사람의 평가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이겠지. 방금 만난 서장이라면 이오리의 일거수일투족과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기울였을 것이 뻔했다. 조금 비꼬아 생각하면 무시당하는 느낌이라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이것저것 질문하지 않는 건 피곤하지 않아서 편하다. 무엇보다도 이오리는 리쿠를 평가하기 위해 이 거주구에 온 것이 아니었다. 순찰에 따라나서기로 한 것도 이 거주구의 지리를 눈으로 파악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256’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물론 지금까지의 여정은 평화롭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이걸로 거주구 서쪽은 다 돌았어요! 다음은 동쪽인데, 지도에도 나와 있듯이 병원이라던가 보육원 같은 중요 건물은 거기 밀집되어 있거든요. 좀 더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거 같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상관없습니다.”
“그럼 가시죠!”
자전거를 끌고 방금 전까지 돌았던 길을 착실히 앞서 가면서, 리쿠는 또다시 자신을 알아보고 말을 건네는 주민들에게 일일이 화답해 주었다. 친화력으로 따지면 경시청 최대의 마당발이라고 불리는 미츠키 못지않을 정도다. 아마 그는 이렇게 되기까지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겠지. 물론 이런 평가는 의미가 없다. 자신은 이 거주구의 치안을 평가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즈미 이오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거주구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테러 조직의 꼬리를 잡아 일망타진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눈에 띠는‘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순찰 방식, 효율성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네? 그래요?”
그래요? 라니. 이오리는 이마를 짚었다. 역시 이 거주구의 경찰서는 무사안일주의에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다른 거주구에 비해 평화로운 구석이 있어서인지, I-7 경찰서에 소속되어 있는 인원은 리쿠를 포함해 단 다섯 명 뿐이었다. 그나마도 교대제로 일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아침부터 저녁 시간까지 근무하는 인원은 두 명 정도가 된다. 한 명은 서를 지키고 다른 한 명이 순찰을 도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점은 추가 모집 허가가 정부에서 내려지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나칠 정도로 효율적이지 못하다.
I-7 거주구는 거주구 중간에 있는 구청과 경찰서를 기점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뉜다. 먼저 돌아본 서쪽은 일반 거주자들의 거주 구역으로, 있는 건물이라고 해봐야 작은 주택 여러 채와 간간히 보이는 상점가, 그리고 사회 유지 노동 현장이 전부다. 그에 비해 뒤이어 돌아본 동쪽은 국가 보증 기관인 병원과 보육원을 포함해 각종 중요 기관이 밀집되어 있다. ‘256’같은 테러 조직이 노리는 장소도 필히 이런 곳일 테지. 그런 장소를 돌아다니는 데 경관 한 사람만을 투입하는 데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일반 거주구에 비해 순서를 뒤로 미루고 있다는 건 이오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순서를 짠 게 경찰서장이라면 무능하기 그지없는 일처리인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만. 좀 더 개선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거주구에 ‘256’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생긴 시점이라면 더더욱.”
그런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나서 리쿠를 쳐다보았다가, 흠칫했다.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이오리를 쳐다보는 리쿠는 방금 전 이오리가 늘어놓은 말을 태반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이오리는 제 실수를 깨달았다. 이건 일반 경관에게 할 말이 아니다. 서의 총 책임자는 경찰서장이니, 충고가 받아들여지길 바랐다면 그를 직접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흥분해 버렸군. 사실 이것은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 이오리의 나쁜 버릇이었다. 경시청 내에서 이오리는 그 어떤 상황이든 냉정하게 파악하여 그 순간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지나칠 정도로 바른 말만 하는 이오리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경시청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이 무해함의 덩어리 같은 사람에게 비호감을 살 리 없고, 무엇보다도 비호감을 산다 하더라도 업무에 전혀 지장은 없겠지만, 어쨌든 신입 경관을 붙잡고 이렇게까지 떠들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으흠, 하고 짧게 기침을 하고 잊어달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것도 옳다곤 생각하지만…… 좀 이상하지 않나요?”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그렇게 말한 리쿠의 모습에서는 왜인지 모를 확신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해 온다, 이건가. 그 눈빛을 보자 잠시 잊고 있었던 투쟁심이 되살아났다. 이상하다니, 어떤 점이 말이죠? 되묻자 리쿠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야, 어떤 사건에서든 가장 위험한 건 일반 거주자들이잖아요?”
“……!”
“확실히 ‘256’같은 거대 테러조직이면 중심가를 노리겠지만, 그런 게 아닌 단순 사건은 일반 거주 지역에서 더 자주 일어나요. 요 3년 간 저희 거주구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통계를 내 봐도 약 70%는 서쪽에서 발생했는걸요. 소매치기나 취객들의 싸움 같은 작은 것들이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거기 사는 사람들이 뒤집어쓰잖아요. 그리고 저희 거주구 중요 시설들엔 방범 시설이 꽤 잘 되어 있어요. 별다른 사건도 안 일어나고요. 아, 물론 신경을 써야 한다고는 생각해요! 그래서 순찰 돌 때도 더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된…… 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거였는데…… 조, 조금 주제넘었나요?”
방금 전까지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던 눈동자가 어느새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원래의 소심함을 되찾았다. 그만큼 자신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오리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표정은 좋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딱히 불쾌해서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제 의견을 피력하는 당당함에는 상쾌함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다만 표정이 굳어졌던 것은 자신의 편협함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게 당신의 정의관인가요?”
“아, 하하……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지만, 뭐 그런 느낌이에요. 전 이 거주구가 정말 좋으니까, 여기 사는 사람들 모두 평화롭게 웃으며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충분히 훌륭한 목표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이 거주구는 평화롭고, 또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정의관이 착실히 반영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상기된 얼굴을 좀 더 붉게 물들인 채 리쿠가 헤헤, 하고 웃었다. 그가 입고 있는 새파란 순경 제복과 대비되어 그 붉은 기운은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업신여기고 있었던 건가.’
나나세 리쿠라는 이 순경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허술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첫인상에서 느껴졌던 리쿠의 평가를 완전히 고쳐 쓰고서 이오리는 작은 미소를 얼굴에 띠웠다.
*각 샘플은 완전히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1.
“너, 이거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미츠키가 명함을 뒤집어 보았다. 계산대 옆에 놓인 명함으로, 앞면에는 점장 즉 로쿠야 나기의 이름과 가게의 대표 전화번호, 지도가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나기 본인이 써 준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다. 아마도 나기의 개인 번호일 것이다. 계산을 마친 뒤 나기에게 뭔가 받을 것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한 리쿠의 말에 따라 가게를 나가려던 미츠키에게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건네준 명함이었다.
“솔직히 수상하지 않습니까? 단골을 하나 더 늘리고 싶다기엔 지나친 서비스인데요. 부탁할 필요 없다는 말도 분명 들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게. 가게 들어갔을 때의 시선도 신경 쓰이고 말이지…… 목적이 단순히 손님 확보라고 하기엔 여러모로 수상쩍어.”
“설마 ‘256’의 관계자인 건……."
“아니, 그건 좀 지나친 생각인 것 같아. 적어도 가게 안에 수상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어. 게다가 경찰이 그렇게 버젓이 드나드는 곳에서 수상한 짓을 하긴 어렵지 않겠어?”
“그 경찰이 나나세 씨를 얘기하는 거라면 아예 제하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전혀 경계하고 있지 않잖아요, 저 사람.”
“뭐, 리쿠는-밥을 먹는 동안 미츠키는 리쿠에 대해 말을 놓기로 했다-그런 거 신경 안 쓰는 타입일 것 같으니까.”
“근무 시간 외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경계심이 없는 건 자격 미달 아닙니까?”
“글쎄? 그런 것치곤 꽤 호의적이지 않아, 너?”
예? 하고 되물으며, 이오리는 미츠키를 향해 경악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생각이었다. 반면 미츠키는 이오리의 그런 의문을 하나씩 깨부숴 줄 기세로 태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순찰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상사를 순찰에 끌어들이다니 무슨 소리냐며 툴툴거리다가도 오늘 종일 돌아다녀 줬지, 그뿐 아니라 왠지 사이 좋아져서 돌아와갖곤 같이 저녁도 먹었지, 방금 먼저 돌아가도 된다고 했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 꽤 마음에 든 거 아니야?”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흐음- 그럴까나?”
“아니라니까요. 순찰에 따라간 건 마을 지리를 좀 파악해 두기 위해서였고, 저녁 식사는 형의 연료 보충을 위해서였다고요. 또 기다리고 있는 건, 돌아가려는데 형이 먼저 말을 거셨잖습니까. 저 카페 점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냐고요. 그래서 대화에 어울리느라…….”
“내가 말 걸기 전까지 카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녀석이 할 소린 아닌데.”
“윽…….”
더는 할 말이 없어져 얼굴을 붉히자 미츠키가 하하, 하고 웃었다. 장난 좀 쳐 본 거야, 임마. 정색하고 반응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미츠키가 이오리의 등을 세게 내리쳤을 즈음-의수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무척 아팠다-카페 문이 열리며 리쿠가 밖으로 나왔다. 품에는 두툼한 꾸러미가 들린 채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보다도, 적절한 타이밍에 밖으로 나와 분위기를 쇄신시켜 준 반가움이 커 이오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런 이오리를 장난스레 웃으며 쳐다보던 미츠키가 밝은 목소리로 리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거 뭐야?”
“아, 샌드위치 좀 싸 달라고 했어요. 내일 아침밥이랑, 또 이 앞 역에 들르려고요. 밤 순찰 때문에요.”
“순찰이요? 왜 굳이 밤에…… 낮엔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까?”
“그 역, 밤에 노숙자들이 몰려들거든요. 다들 잠만 잘 뿐이라 해 끼치는 건 없지만 주변 거주자분들이 불안해하셔서, 매일 근무 끝나면 돌아보곤 해요. 겸사겸사 샌드위치도 나눠주고. 두 분은 먼저 돌아가셔도 돼요!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
환하게 웃고 꾸러미를 고쳐 안은 채 리쿠가 역을 향해 사라져 갔다. 말은 저렇게 해도 더 이상 쓰지 않는 시설이니 전기가 들어올 리 만무하고, 제복은 갈아입었을 테니 무기도 소지하지 않았을 텐데, 혼자서 돌아다녀도 괜찮은 걸까. 아니, 매일 돌고 있다고 하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시선을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아니나 다를까 미츠키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봐, 신경 쓰고 있지.”
“그, 그런 거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 그래. 그런 걸로 쳐두자. -는, 농담이고. 사실 나도 좀 신경 쓰였어. 평소엔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256'이 이 마을에 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폐쇄된 역사는 수상한 녀석들의 집합 장소로 딱이잖아. 제보자도 늦은 시간에 공장에 모인 걸 봤다고 그랬고.”
“……!”
“어떡할래? 지금이라도 따라가 볼래?”
“알겠습니다. 그럼 저 혼자 따라가 보죠. 혹시 모르니 형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원 요청을 해야 될지도 모르니까요.”
“오케이.”
카페 앞에 미츠키를 남겨두고 이오리는 리쿠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인지 역 앞에 도착할 때까지 리쿠를 발견하는 일은 없었다. 홀스터에 꽂아둔 권총을 빼들고, 이오리는 천천히 역 안으로 발을 옮겼다. 깨진 창문 사이로 드문드문 들어오는 달빛을 제외하면 정말 주변이 캄캄해서, 리쿠가 어디쯤 있는지도 알기 힘든 지경이었다. 이런 델 잘도 혼자서 들어오는군요. 혀를 한 번 차고 핸드폰을 꺼내 길을 밝혔다. 곳곳에서 노숙자 특유의 시큼한 냄새가 났다. 바닥 곳곳에 신문지나 종이박스를 덮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국가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대부분의 인구가 노숙자로 전락한 지금 상황에서는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낮에 본 I-7 거주구의 풍경이 너무도 평화로웠던 탓인지 오히려 적응이 안 될 지경이다. 게다가 분위기 탓인지 공원 밖보다 훨씬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든다. 코트 옷깃을 여미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과 함께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생활은 좀 어떠세요? 얼마 전에 아사다 아저씨 감기가 꽤 오래 가던데…….”
“아, 그건 골치였지. 같은 텐트 쓰는 놈한테만 옮겼으면 될 텐데, 곳곳에 퍼져서 말야. 야마모토는 아직도 기침하고 다닌다니까.”
“그러게나. 씻을 데만 있었어도 좋았을 걸.”
“셸터 설치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그래요. 저번에 신청 넣은 것도 반려된 모양이고……. 이번에 한 번 더 문의해볼게요.”
“매번 미안허이. 순경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 신경 써서 좋을 거 하나 없을 텐데.”
“에이, 또 그러신다. 이 정도는 당연히 제가 할 일이죠. 아저씨들은 그냥 건강하게 지내 주시면 돼요.”
이오리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염려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건전지로 작동하는 작은 램프를 가운데 두고 몇 명의 노숙자들과 둘러앉아서 대화하는 리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오리가, 총까지 들고 들어온 자신이 한심해져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행이게도, 어라? 이오리 씨? 하는 부름이 들린 것은 마침 홀스터에 총을 돌려놓은 뒤였다. 망신당하는 건 면한 셈이다.
“이오리 씨, 먼저 들어가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 순찰이라면 저도 함께할까 싶어서 온 겁니다만, 필요 없었던 모양이군요.”
“이 분은 누구시래? 동료분인가?”
“이런 경찰 있었나?”
리쿠의 어깨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며 수군대는 노숙자들은, 좀 더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나이가 나이인만큼 사회 유지 노동에 참가하지 못하고 일반 거주자 자격을 따지도 못해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람들은 이오리가 사는 거주구에도 꽤 많이 있었다. 경계할 필요가 전혀 없었잖아. 생각하며 이오리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었다. 크게 착각한 것도 부끄럽지만, 무엇보다 냄새가 너무 심해 머리가 어지럽다.
“아, 이오리 씨, 일단 여기서 나가요. 아저씨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또 올게요!”
“그래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오늘도 밥 잘 먹을게!”
손을 흔들어대는 노숙자 그룹을 뒤로하고 리쿠는 이오리의 등을 오던 길 쪽으로 밀었다. 그만 미세요, 다 왔습니다. 출구가 보일 때쯤이 되어 이오리가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에야 리쿠는 겸연쩍게 이오리의 등에서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나쁜 분들은 아닌데, 경찰을 엄청 경계하시거든요. 저희 서 선배들하고도 엄청 싸우세요. 이오리 씨가 형사라고 하면 더 경계하실 거 같아서. 저 오기 전에는 주로 이 앞 공원에서 지내셨는데, 주변의 불만 신고가 하도 많이 들어오니까 서에서 꽤 난폭하게 내쫓은 모양이에요. 이 역은 아무도 안 쓰니까 그나마 괜찮지만…… 빨리 셸터 설치를 해야 될 텐데, 쉽게 통과되질 않나봐요.”
“꽤나 골치 아프겠군요. 강제로 내쫓을 수도 없을 테니까요.”
“내쫓다니, 절대 안 돼요! 가실 데도 없는 분들인걸요! 또 나이 드신 분들 뿐이라 위험하지도 않아요. 그야 저도 처음 왔을 땐 엄청 경계당해서, 돌에 머리를 맞은 적도 있지만요. 그래도 나중에 친해졌을 땐 자기들 때문에 흉 졌다고 얼마나 미안해하셨는데요.”
그 정도면 충분히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억눌렀다. 어쨌든 그건 과거의 일인 것 같고, 오히려 먹을 것을 갖다주는 덕분에 반갑게 맞아 주는 것 같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늙고 병든 사람들 틈에 ‘256’의 조직원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순경의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두 기피하기 바쁜 저 노숙자들도 ‘행복하게 웃도록 해주고 싶은 거주구의 주민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지키고 싶은 정의라면, 그것을 부정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꽤 마음에 든 거 아니야?」
“……그 말이 맞을지도…….”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나나세 씨 집은 어디죠? 여기서 멉니까?”
“어…… 여기서부터면 걸어서 15분 정도인데요.”
“그렇습니까? 딱 좋군요. 집까지 데려다 드리죠.”
“네? 왜요?”
“너무 많이 먹어서요. 배를 좀 꺼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카페하곤 반대 방향인 모양이니, 형에겐 먼저 들어가라고 연락하죠.”
“네, 네에…….”
정작 수긍해 놓고서도 리쿠는 자기가 왜 감사하다고 말했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입에 올리지 말라고요. 그런 생각을 했을 즈음이었다.
“이오리 씨는 상냥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생각의 정리가 된 덕인지, 리쿠가 이오리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구김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미소에 가슴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두근.
‘……두근?’
왜 갑자기 가슴이 뛰었지? 이 사람이 웃는 걸 봤다고 해서?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평범한 웃음이었을 뿐인데?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제 얼굴은 리쿠의 머리색만큼이나 새빨갛게 물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리쿠는 이오리의 그런 반응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제 집은 이쪽이라며 먼저 몸을 돌렸다. 어색하게 그 뒤를 따라나서며 이오리는 미츠키에게 상황을 짧게 정리한 메일을 보냈다. 리쿠를 데려다 주고 돌아간다고 하면, 분명 숙소로 돌아갔을 때 엄청나게 놀림 받겠지.
그러니까,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 건 엄청난 일이었다.
2.
“mail, 입니까? 상대는 누구?”
“동생. 리쿠 데려다 주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라네.”
“Oh, 리쿠와 밤산책을 즐기고 싶은 모양이군요. 잘 봤습니다. 리쿠, 같이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좋은 친구지요.”
“좋아, 답장 보냈다. 그래서- 방금 하던 얘기 계속하고 싶은데.”
핸드폰을 닫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미츠키가 똑바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경계 가득한 눈동자에 후후, 하고 짧게 미소지은 나기는 미츠키가 하자고 하는‘이야기’- 그러니까, 정확히 1분 34초 전 자신이 꺼낸 말을 다시 입에 올렸다.
“당신은 정말 사랑스럽군요.”
“그거, 남자한테 할 만한 칭찬은 아닌데.”
“물론입니다. 저도 다른 남성에게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미츠키, 당신이니 하는 말입니다.”
“그럼 그 말 진심으로 한 거야?”
“그렇습니다. 저는 첫눈에 당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웃으면서 나기는 미츠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미츠키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변했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사람-그것도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고 심지어 그 남자가 제 앞에 무릎까지 꿇었으니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미츠키 외의 누구라도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어쨌든 당황한 표정이 일품이었다. 덧붙여 그것으로 미츠키는 자신이 가게에 들어온 순간 나기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 이유를 납득해준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부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나기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겠지만.
“당장 대답을 원하진 않습니다. 당신이 이 거리에 머무는 동안 잘 생각해서 대답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생각하고 자시고,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고백 받으면 당황하는 거 외에 다른 반응이 안 나오는데?”
과연 그럴까요?
내가 당신을 본 것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질렸다는 미츠키의 태도에 애매모호하게 웃으며 나기는 미츠키의 손을 잡았다. 흠칫 하고 손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이 의수에 설치된 총이 갑자기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이해가 됐다. 아까 식당에서는 나나세 리쿠에게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제 몸의 비밀을 공공연한 장소에서 크게 떠들어대는 게 꺼려졌기 때문인지, 어쨌든 조금 거짓말을 섞어 말했다. 가장 싼 의수를 붙였기 때문에 별다른 기능이 붙어 있지 않다고. 없어진 팔다리 대신 달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지요.’
이즈미 미츠키의 이 개조된 몸이야말로, 그가 경시청의 형사로 일하며 이즈미 이오리의 파트너로 남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팔과 다리에는 현재 잔존해 있는 과학기술의 정수가 담긴 각종 무기들이 설치되어 있고, 웬만한 공격에는 망가지지도 않는 특제 의수. 어쩌다가 미츠키가 이런 의수를 달게 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로쿠야 나기였다.
처음 스코프 너머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날이 떠오른다. 밤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던 눈동자에 자신이 매료되지만 않았어도 이즈미 미츠키는 이 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없었을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 직후 집중사격을 가해 그의 양팔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일어서려던 당신은 정말로 아름다웠지요. 그래서 다리도 똑같이 만들어 줬지만.’
‘그대로 복귀할 생각은 접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기가 죽은 당신은 아름답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지금 나기가 붙든 것은 나기 본인이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는 손이다. 그 사실이 너무도 황홀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흠칫 놀라며 미츠키가 손을 뒤로 뺐다. 저런, 저런. 제 천사는 경계심도 깊군요.
“저는 진심입니다, 미츠키. 그러니 부디 잘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건 당신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니까요.”
“……?”
덧붙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인 미츠키의 시선을 피해, 나기는 생긋 웃고 미츠키에게서 등을 돌렸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랍니다, 나의 미츠키.
저는 상관없지만, ‘보상’으로 주어지는 당신은 분명 지금의 당신으로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3.
“뭐야, 왜 이런 전개가 되는 거야? 재미없게.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엔딩 분기점이람.”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남자는 피우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 하고 아쉬운 듯한 목소리가 턱 밑에서 울렸다. 그걸 왜 아깝게 거기다 끄냐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나 다를까, 몸 위에서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남자의 턱 밑에 조르듯 입을 맞추는 자신의 애완동물을 바라보며 남자는 혀를 찼다. 이봐, 이봐. 모니터 좀 보라구. 앞으로 30분 정도면 전원이 여기로 돌입해 들어올 텐데, ‘인질’이라는 설정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런 소리를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 점이 귀여워서 옆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인질극 같은 건 재미없으니까 이번 판은 여기서 접자. 애들한텐 No.6이 알아서 지시 내릴 테니까, 넌 원래 계획대로 무사히 구출되도록 해.”
“네에…….”
“자, 얼른 옷 입고. 그 전에 배에 묻은 것 좀 닦고. 왜 멋대로 야한 짓 하고 앉았어?”
“그치만, 마스터가 너무 멋있어서…… 죄송해요…….”
사과한 것치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또다시 키스를 졸라 오는 그를 무시한 채 남자는 손을 뻗어 패널을 조종했다. 모니터에 붉은 머리의 청년이 클로즈업된다. 나나세 리쿠, 라.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턱 밑에서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비밀을 숨기고 있었네. 깜찍하게도. 하지만 이래서야 이간질 작전이 소용이 없잖아. 심각한 연기 하느라 엄청 고생했다고? 명대사까지 남겨주고 왔는데 말이야.”
패널을 다시 조작하자, 이번에는 이즈미 이오리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리쿠를 바라보고 있는 입술이 언제 말을 뱉어내야 할 지 몰라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감상하다 말고, 남자는 문득 애완동물의 반응이 조용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여전히 목을 끌어안고는 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아 보인다. 욕심도 많으시지. 끌끌 혀를 차면서 남자는 손을 뻗어 새하얀 옷 너머로 드러난 가슴께를 지분거렸다. 민감하게 서 있던 돌기에 손이 닿자 가죽 장갑의 감촉이 맘에 들었는지 곧 교성이 터져 나왔다.
“있잖아. 지금 떠오른 건데. 이렇게 요란하게 병원을 점거해 놓고 아무 일도 없으면 조금 심심하지 않을까?”
“응……?”
“예를 들어서…… 그래. 인질 중 하나가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본보기로 성적 폭행을 당해 너덜너덜해진 채 발견된다- 는 전개는 어때?”
“이번엔 그런 장난? 좋아요. 마스터가 하라고 하신다면.”
“어쭈, 좋아한다 이거지? 근데 난 구멍 공유하는 취미는 없는데? 내 걸 아랫것들한테 돌릴 순 없지.”
“그럼 마스터가, 직접?”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줘도 좋겠지?”
“응…… 응, 좋아요…… 거기 좋아…….”
방금 전까지 불쾌하다는 표정 짓고 있었던 주제에, 조금 만져주니까 바로 반응하기는. 큭큭 웃으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순전히 재미만을 위해, 애완동물의 지뢰를 한 번 더 건드렸다.
“게다가 그거면 동정을 사서 접근하기도 쉬울 거야, 그치?”
“……그거, 그래서 하는 거예요?”
“얼마나 재밌어? 테러리스트에게 직장을 점거당한 것도 모자라 여교사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제 한 몸 바친 상냥하디 상냥한 의사 선생님이, 사실은 그 테러리스트 보스가 키우는 음란한 수캐였다는 걸 알았을 때 저 순수한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질지 상상해 봐!”
도발하기 위해 꺼낸 말이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다. 키득키득 웃는 남자와는 달리, 애완동물은 그 제안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체엣…… 그럼 안 해.”
“오호라, 반항기? ……뭐, 상관없지만.”
“……정말 안 해도 상관없어요?”
“응- 전혀 상관없어.”
“…….”
“어라, 왜 이러실까? 엄청 불만스런 표정이네.”
“……나, 저 애 싫어요.”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눈초리가 모니터 너머의 나나세 리쿠를 향했다. 그래? 하고 되묻자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착한 척하면서 주인님 관심 다 가져가고, 너무 싫어…….”
“글쎄.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저 애의 경우는 정말 착해빠진 거라고 생각하는데. 것보다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몰라요, 몰라. 봐, 또 감싸주잖아……. 아, 지금 당장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리고 싶어…….”
“……난 그런 명령 한 기억은 없는데.”
“다 끝나면 저 애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안 쓸 거면서……."
“설마. 난 우리 순경님에게 질릴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꽤 오래 갖고 놀 수 있을 것 같잖아?”
지뢰는 얼마 가지 않아 폭발했다. 목에 매단 손에서 힘이 풀리며 자연스레 남자의 손을 떠나, 반라의 상태였던 애완동물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옷을 겹쳐 입는 모습은 그 외모와 어우러져 상당히 처연해 보였지만 입에서 뱉는 말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주사 가득, 미치게 만들어서, 던져줘 버릴 거야. 망가뜨릴 거야. 엉망진창으로. 그 독기서린 저주를 턱을 괸 채 즐겁게 감상하고 있다가, 방을 나가려는 것을 보고 남자는 입을 열었다.
“까불지 말고, 아무 짓도 하지 마. 얌전히 데려와. 이건 명령이다.”
“…….”
“대답.”
“……네, 마스터.”
살포시 문이 닫혔다. 마지막 한 마디는 어딜 봐도 명령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저치는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독극물이 든 주사기의 주삿바늘을 제 목에 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웃으면서 남자는 패널을 툭툭 두드렸다. 모니터 화면 가득 떠 있는 이즈미 이오리와 나나세 리쿠의 얼굴을 바라보며 ‘code:256’의 보스는, 얼굴 가득 음흉한 미소를 떠올린다.
“다음 장난은 너희 두 사람을 위한 스페셜 무대다. 여태까지완 달리, 아주 재미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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