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 세이쥬로가 슈토쿠/라쿠잔에 재학한 자신을 번갈아가며 꿈으로 꾸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쪽이 현실인지는 비밀입니다.
*슈토쿠 아카시는 중학교 이래 농구를 그만두었다는 설정입니다.
*라쿠잔 아카시는 원작 그대로 라쿠잔 고등학교 농구부 주장입니다.
*소설 후반부에 <쿠로코의 농구> 270Q (일본 현지 점프 발매분)의 네타바레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요주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벚꽃잎을 바라보며 아카시 세이쥬로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 그가 입은 교복에, 신발에, 마치 자석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붙어 검정색을 연한 분홍으로 물들이는 그 아름다운 풍경이- 어째서인지 무척 낯설었다. 아니, 낯선 것도 당연한가. 오늘은 새로운 학교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날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이전까지와는 다른 인연을 쌓기 시작하는 날. 아카시 세이쥬로는 졸업 전 사전 견학을 왔을 때 외에는 이 학교를 방문한 적이 없었고, 그 때는 아직 벚나무에 꽃이 피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러니 머리 위로 떨어지는 이 벚꽃잎과 새로운 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은 마치 잘 짜인 교향곡 속에 그 곡의 전체를 망치는 불협화음처럼 낯선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아, 그래도 불협화음은 너무했나. 나름대로 수석 입학한 셈인데 말이야. 어깨에 붙은 벚꽃잎을 털어내면서 아카시는 등을 돌려 자신이 입학하게 될 학교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역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고답게,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딱딱한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아카시 세이쥬로는 이 학교의 1학년이 된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문득, 아카시는 어떤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 학교, 이름이 뭐였지?
“아카시!”
저 멀리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아카시는 고개를 돌렸다. 가족과 겨우 헤어졌는지 교문 쪽에서 부리나케 달려오는 키 큰 남학생의 실루엣이 아카시 세이쥬로의 붉은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뿐 아니라, 안경 너머에 감춰진 올곧은 눈동자도 무척 낯이 익다. 아카시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 떠올려 냈다는 듯 상대의 이름을 새삼스레 입에 담았다.
“미도리마.”
“미안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사코 붙잡으셔서. 오래 기다렸나?”
“아니, 벚꽃이 아름다워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어.”
생긋 웃어 보이는 아카시의 모습에 미도리마는 잠시 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얼굴에 슬며시 드러난 붉은 기색은 저 멀리서부터 뛰어왔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 의문을 품고 가만히 고개를 옆으로 기웃거리자 미도리마의 얼굴이 방금 전보다 좀 더 붉어졌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운 걸까. 쿡쿡 웃는데, 미도리마의 손이 아카시의 머리로 향했다. 가만히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손가락이 어색했다. 이상하다, 늘 보아온 손가락인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그 원인을 찾던 아카시는 그제야 미도리마 신타로가 제게 뻗은 손이 왼손임을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제 저 손가락에- 손톱을 보호하기 위한 테이핑 테이프는 더 이상 감겨 있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머리에…… 꽃잎이 묻었다는 것이다.”
“아, 정말? 큰일이네. 많이 묻었어?”
“괜찮다. 떼어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마는 손을 폈다.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 놓여 있던 벚꽃잎은 곧 바람에 실려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아카시가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고 있자니, 미도리마가 다시 손을 뻗어 아카시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단추를 제대로 채우라는 것이다. 잔소리와 함께 미도리마의 손이 가쿠란의 단추를 목까지 깨끗하게 채웠다. 더워. 핀잔을 주며 눈을 흘겨 봤지만 미도리마는 막무가내였다.
“잠시 후에 신입생 연설을 해야 할 녀석이 단정치 못한 옷차림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 그랬지. 깜박 잊고 있었어.”
“잊고 있었다니…… 연설 내용까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 어젯밤 전부 외웠으니까. 내 기억력을 의심하는 거야?”
“방금 전 깜박 잊고 있었다고 말한 녀석이 잘도 말하는군.”
쯧, 하고 혀를 찬 미도리마가 손을 떼었다. 어느새 미도리마의 얼굴 가득했던 홍조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것을 잠시 아쉽다고 생각하며 아카시는 미도리마와 함께, 신입생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는 슈토쿠 고등학교의 대강당으로 발을 옮겼다.
아, 그래.
이 학교의 이름은, 슈토쿠 고등학교였어.
“눈 밑이 조금 붉은 것 같은데.”
“아, 눈치 챘어? 어제 아버지가 갑자기 오시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못 잤거든. 엄청 혼났어. 내가 입학시험에서 한 문제를 틀릴 뻔했다는 얘길 들으셨나 봐. 이번 과외교사는 능력은 있지만 입이 가벼워서 문제야.”
“나 참…… 너희 아버지는 여전하시군. 애초에 슈토쿠의 입학시험을 단 하나의 오답도 없이 통과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란 것이다. 넌 충분히 대단해.”
“……미도리마가 순순히 칭찬하니까 뭔가 이상한걸.”
“솔직하지 않아서 미안하게 됐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정말 뭔가 이상해.”
그래, 이상하다. 미도리마 신타로의 입에서 순순히 흘러나오는 ‘대단하다’라는 칭찬이, 왜 이렇게 낯선 것일까. 마치 미도리마의 테이핑을 하지 않은 왼손을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낯선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아카시가 미도리마에게서 그런 칭찬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분명 예전부터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자신보다 좋은 성적을 받거나 자신과의 장기 대국에서 이길 때마다 아카시의 우월함을 솔직하게 칭찬하고는 했었다.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찬양하는 수많은 칭찬들 중에서도 그 말만큼은 아카시에게 특별했었다.
“……아, 그건가.”
“또 뭐가 말이냐.”
“‘다음에는 내가 더 잘 하겠지만’이라는 말이 빠졌어.”
“무슨 소리냐. 입학시험에 다음이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첫 중간고사라면 또 모를까.”
“후후, 그 때는 날 이겨볼 거야?”
“당연하다는 것이다. 방심하지 않는 게 좋아.”
“응, 기대할게.”
이제야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래야 미도리마 신타로답지. 언제나 성실하고 강직한 자신의 친구는, 자신에 대한 솔직한 칭찬의 말이 끝나면 어김없이 자신의 각오를 설파하고는 했다. 다음 시험에서는 너를 앞지를 것이라든가, 다음 대국에서는 결코 지지 않겠다든가. 다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 적은, 미도리마에게는 무척 아쉽게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카시는 늘 그 한 마디에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는 했다. 미도리마 신타로는 결코 공격의 창을 늦추지 않는 매서운 라이벌이다. 슈토쿠에서도 그의 도전은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진인사대천명. 그 말의 화신과도 같은 제 친구를 슬쩍 쳐다보고 아카시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겸연쩍은 듯 에헴, 하고 기침을 흘린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신입생 대표 자리까지 안내해 준 뒤에야 제가 있을 곳으로 돌아갔다. 반주자 제의가 들어왔을 때 승낙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좀 더 가까운 데 앉아 있을 수 있었는데. 그 점을 무척 아쉽다고 생각하며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과 대화하는 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어라? 저 애……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카시가 그렇게 생각하며 ‘어디서 본 것 같은’이라는 애매한 단어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말 저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무척 낯익은 얼굴이다. 테이코 중학교의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잠시 고민하던 아카시는 곧 입학식이 시작된다는 방송에 그들에게서 시선을 뗐다. 뭐, 괜찮아. 미도리마의 옆에 앉아 있는 이상 저 소년은 아카시와도 같은 반이라는 얘기가 된다. 나중에 교실에서 물어 보면 되겠지. 그것보다는 신입생 대표 연설에 집중해야 한다. 만의 하나라도 실수가 있는 날에는 또 아버지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카시가 도쿄 내에서도 명문인 슈토쿠를 골랐을 때 별다른 반대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학교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이름 때문에 아카시가 고등학교에서마저도 ‘쓸데없는 짓’을 할까 노심초사했었다.
‘……하지만 이미 그만두기로 했는걸. 계속할 리가 없잖아.’
아카시 세이쥬로의 중학 3년을 장식했던 농구는, 적어도 아카시에게 있어서는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고등학교에 진학해서까지 계속할 정도로 ‘필사적인’것도 아니었다. 원래부터 어머니와의 추억을 위해, 그리고 테이코 중학교가 내세우는‘백전백승’의 슬로건이 마음에 들어서 시작한 농구였다. 그 3년 동안 아카시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젠 충분하다.
“자, 그러면 올해부터 농구부를 이끌 새 주장을 소개하겠다. 아카시.”
순간 불린 자신의 이름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고개를 들었다. 체육관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아차, 졸아 버렸던가. 입학 첫날부터 볼품없어 보일만한 짓을 했다고 자책하며, 아카시는 머리카락을 슬쩍 어루만졌다. 연단 위에 서 있는 감독은 그런 아카시의 태연한 행동에 불만스런 시선을 던졌다.
“아카시, 뭐 하고 있나. 어서 올라와라.”
“아, 예.”
아카시가 발을 떼자 부원들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 질서정연한 동작 속에는 분명 아카시를 향한 비난과 질타의 목소리가 섞여 있을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 주장으로 뽑힌 인물이 아무런 실적도 없는 1학년인 것을 불만스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곳이 고교 농구대회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는 절대적 강자라면 더더욱-
‘……아.’
그리고 그 순간 아카시는 깨달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카시 세이쥬로입니다. 테이코 중학교 출신으로, 2년간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주장을 맡아왔습니다. 저를 믿고 중책을 맡겨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저는.”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체육관이, 대체 어느 학교에 소속된 것인지.
“앞으로 저는…… 이 라쿠잔 고등학교 농구부의 새로운 주장으로서, 부원 여러분을 충실히 이끌 것을 약속드립니다.”
라쿠잔 고등학교.
아카시 세이쥬로는 중학교 3학년 겨울, 지금 옆에 서 있는 라쿠잔의 감독 시로가네 에이지로부터 지명을 받았다. 고교 농구의 절대 강자. 그 학교의 능력은 수많은 대회에서의 우승 경력과 일명‘무관의 오장’이라 불렸던 재능 있는 농구 선수 세 명을 확보했다는 사실로 중학 농구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학교였다. 그러나 아카시는 자신이 라쿠잔의 지명을 받은 것을 뿌듯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결코 지지 않는다. 승리만을 추구하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런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 학교가 이상한 것이다. 고등학교에서도 아카시가 농구를 계속할 생각이라는 것을 전해들은 아버지 역시 라쿠잔으로 진학할 생각이라는 사실을 듣자 아무 말도 없이 교토에 새 집을 마련해 주었을 정도다. 아카시는 자신이 라쿠잔에 있는 것은 무척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신입생이면서도 농구부의 주장 자리를 차지한 것 역시 무척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신에게 과분한 자리를 주어 감사하다고 말한 것은 오직 자신을 기껍게 바라보는 몇몇 선수들의 불만을 종식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그럼, 방금 전의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슈토쿠 고등학교라는, 중학교 3년 내내 선택지에도 넣지 않았던 학교에 어째서 아카시 세이쥬로가 있었던 것일까.
‘……단순한 꿈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 꿈은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코미디다. 어째서 자신이 농구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농구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우월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일반 선수들보다 훨씬 작은 키에 중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본격적으로 농구를 배워본 적도 없었던 선수가 한 팀을 이끌고, 3년 내내 그 팀을 우승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스포츠계를 뛰어넘어 아카시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다. 그랬으니 그 완고한 아버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 모든 찬사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이 그 학교를 택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다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만, 라쿠잔에서의 위계질서는 오로지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능력의 세계에서는 선배도 후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주장이 신입생이든 아니든 무조건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카시의 지시에 불만이 있다면 능력으로 그를 이긴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을 지도하는 사람은 나지만, 팀을 이끄는 사람은 아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감독의 엄격한 한 마디에 방금 전까지 불만의 시선을 주고받던 학생들 모두가 등을 곧추세웠다. 예! 하는 우렁찬 대답이 흘러나온 순간부터 아카시를 바라보는 모든 시선에는 불만의 기색이 사라졌다. 과연, 전 국가대표 주장의 이름은 헛된 것이 아니었군. 뒷짐을 지고 선 시로가네를 흘깃 쳐다보며 아카시는 테이코 중학교 시절의 감독을 떠올렸다. 그 역시 시로가네 가문의 사람이었다. 유능하고, 아카시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그가 부를 이끌어 가는 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비록 병으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아카시는 그 도움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지금 제 옆에 선 이 감독 역시 그만큼, 아니, 혹은 그보다 더한 지원을 아카시에게 베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은 했다만, 자네에게도 그 사항은 해당이 되네. 지금 이것이 파격적인 인선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거야. ‘기적의 세대’의 주장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활약을 기대하네.”
“맡겨주십시오.”
“그럼 지금부터 플랜에 따라 훈련을 개시한다. 아카시, 자네는 1군의 훈련을 총체적으로 지휘하도록 하게. 계획표는 받았을 테지?”
“예.”
“그럼 해산하도록!”
감독의 말에 부원들이 저마다 연습 태세로 흩어졌다. 2군 이하의 부원들 모두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체육관으로 해산하고 나자 아카시의 앞에는 몇 명의 1군 멤버들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가득한 투지와, 몸을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엿볼 수 있는 재능의 흔적에 아카시는 테이코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천재’라는 칭호가 결코 헛되지 않았던 테이코 중학교의 농구부 멤버들- 일명 ‘기적의 세대’라 불렸던 그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천재 스코어러 아오미네 다이키, 올라운더 플레이어 키세 료타, 톱 피지컬 센터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그리고-
“……훈련을 시작하지.”
No.1 슈터, 미도리마 신타로.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아카시 세이쥬로는 자신이 차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도리마 신타로.
그는 지금, 슈토쿠에 있다.
“하하, 미도리마…… 얼굴이 엉망진창이야…… 읏.”
몸을 움직이자 연결되어 있는 아래쪽에서 견딜 수 없는 자극이 전해져 와 아카시를 괴롭혔다. 그제야 미도리마는 자신이 아직도 아카시의 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떼었지만, 그 순간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액체는 그 현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미도리마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카시는 제 배를 더럽히고 있는 자신의 액을 쓸어보았다. 끈적끈적해. 중얼거리자 미도리마가 황급히 셔츠 옷깃으로 아카시의 손을 닦아냈다.
“그, 그런 건 만지지 말라는 것이다.”
“왜?”
“왜냐니…… 그건…… 그, 파괴력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파괴력? 그것은 방금 전까지 아카시의 몸을 갈라버릴 기세로 몸을 움직였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여유 있게 웃는 아카시에 비해 미도리마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몰아붙인 결과 아카시가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는데. 이건 내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니까.
“미도리마, 이리 와.”
요청하자, 미도리마는 안경을 도로 쓰다 말고 아카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목을 세게 끌어안고 나서야 아카시는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등장하는 꿈 같은 건 꾸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렇게 좋을 때 산통을 깨게 되잖아. 생각하며, 아카시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슈토쿠와 라쿠잔의 결전에 대해 완전히 지워 냈다. 그런 것보다는 아직도 제 열을 삭히지 못하는 미도리마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난…… 미도리마가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카시.”
“방금 건 굉장히 기분 좋았으니까…… 또 하고 싶어.”
서슴없이 미도리마의 아래쪽으로 향한 손은 다시 곧게 일어서는 욕망을 거리낌없이 감싸쥐었다. 미도리마의 손가락을 연상하게 하는 그것은 크고 길어서, 아카시의 손으로는 차마 다 쥘 수 없을 정도였다. 나도 농구를 했으니까 손은 꽤 크다고 생각했었지만, 미도리마에게는 못 당하겠어. 살짝 웃은 아카시는 다리를 벌려 신음을 흘리며 손을 움직였다.
“읏…….”
갑작스런 자극에 인상을 찌푸린 미도리마가 아카시의 얼굴 옆에 팔을 대고 섰다.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단단한 이성으로 무장해 있던 그 얼굴이 제 앞에서 천천히 풀어지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몸의 쾌락보다도 더할 정도로. 아카시는 손에 힘을 주어 미도리마의 욕망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눈을 살짝 감았다 뜬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손을 뿌리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그 행위를 그저 받아들이고 있었다.
“읏…… 아카시, 잠깐만…….”
“안 돼. 적당히 빼두지 않으면 밤새 괴롭힐 거잖아.”
“그…… 부정하진, 않겠다만, 이대로는…… 윽.”
“괜찮아, 가는 걸 보고 싶어.”
“바보 같은, 무슨 소릴 하는 거…… 윽, 으…… 앗.”
짧은 신음과 함께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손을 가득 메운 미도리마의 액이 급속도로 식어 가는 것이 아쉬워 아카시는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끈적끈적한 손을 살짝 핥자 미도리마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설마하니 아카시가 자신이 낸 것을 핥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